Someone's Gonna Get Their Head To Believe In Something (BYO Records 10 Yr. Anniv.)
1992, Better Youth Organization (BYO 026CD) |
<하드코어 펑크의 등장>
미들클래스, 블랙플래그 등 엘에이 교외 지역 펑크 밴드들이 엘에이에 진출하여 처음에는 엘에이의 77 펑크 밴드들과 공존하나 곧 서로 대립하게 된다. 갈등의 근본 원인으로는 인적 구성이 달라서인데 77 펑크 뮤지션들은 스케이트보드를 즐기는 교외 지역 중산층 청소년들보다는 나이를 좀더 먹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소재 음대, 미대, 예대 학생들 대 서울 근교 도시 고등학생들) 그래서 77 펑크 뮤지션들은 펑크 음악을 예술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프로의 길을 가고 싶어 하지만, 교외 지역 청소년들은 펑크 음악을 나만 좋으면 장땡이라는 놀이 문화로서만 받아들였다. 이러한 차이는 뉴웨이브 음악에 대한 입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77 펑크 뮤지션들은 기성 제도권 음반사와 손잡거나 그들의 요구에 맞게 탈펑크 하는 것에도 관대했으나, 교외 지역 청소년들은 탈펑크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런 가운데 79년 엘에이 경찰의 펑크 대학살이 시작되어 경찰들이 출동하는 공연에 엮이기 싫어하는 밴드와 관객들은 떠나고 골수 펑크 밴드와 골수 펑크족들만 남는다. 이 골수분자들이 자신들이 연주하고 즐기는 음악을 하드코어 펑크라고 한다. (디오에의 앨범명에서 유래하는 거 아님 이미 이 앨범 전부터 사용)
멸시와 냉대, 차별로 하드코어 펑크가 로컬 기반만으로는 유지가 힘들자 하드코어 펑크팬들이 똘똘 뭉쳐 전세계 우정망을 연결짓는다. 여기에는 샌프란시스코의 맥시멈락앤롤과 엘에이의 플립사이드 펜진이 큰 기여를 한다.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에서 찬밥 신세인 이런 음악에 우리나라는 당연히 전혀 모르거나 관심이 없었다. 펑크 황금기인 77-84년은 우리나라에선 샌드페블즈의 나어떡해에서부터 이선희의 제이에게까지 청소년들에겐 대학생 중심 가요제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대학 가요제는 다양한 음악이 공존하는 언더그라운드 씬의 자생에 걸림돌이 된다. 헤비메탈조차 우리나라에선 미국과 일본에서 주류 오버그라운드 음악으로 인정받고 나서부터 생겼다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